『기획의 정석』 —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기획

2026년 3월, 우린 대 AI의 시대에 살고 있다. IT 직종에서 개발자들만 AI를 쓰던 시기는 아주 짧게 끝나버렸다. 이젠 많은 이들이 바이브 코딩이란 단어를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고 수 많은 비개발자들이 클로드 코드를 앞세워서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몇몇 도메인이나 오래된 언어를 제외한다면 고전적인 의미의 개발자는 이제 사라졌다(웹을 플랫폼으로 둔 개발자들의 기존 역할은 아예 절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발자들이 코드를 잘 작성하고 설계를 잘 해낼 수 있고 프로덕트를 다루는 것에 익숙한 것은 여전히 맞지만 비개발자들이 그것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제 개발자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걸까? 난 무엇을 해야할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개발, 디자인, 기획 이렇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 제품 조직 내의 경계가 점점 흐려져 간다.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디자이너는 AI를 활용해 간단한 UI와 로직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었고, PM은 아예 개발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장 내 업무 영역을 침범받는 일은 없었지만, 문득 이대로 괜찮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숙련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개발만 하고 있다가는 운석을 맞고 멸종한 공룡들처럼 되어버릴게다. 개발자 역시 디자인과 기획을 이해하고, AI를 활용해 자신의 역량을 확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미팅에서 PRD나 UI를 보며 몇 마디 의견을 보태는 수준과는 조금 다르다. 앞으로는 기획, 디자인, 개발을 넘나들며 제품을 0에서 1까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어디일까? 바로 기획이다.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거나 필요로 하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제품 형태로 끄집어내는 능력 말이다.

최근, 앤트로픽이 개최한 해커톤에서 개발자가 한 명도 없는 팀이 우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팀은 각자가 특정 도메인에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용자들의 니즈를 누구보다 잘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개발자는 제품을 구현하고, 보완하고, 개선하는 일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용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제품 전반의 사용성과 의도를 깊이 탐구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익숙하다.
물론 다른 도메인의 전문 지식을 단번에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제품을 만들어온 경험이 있는 개발자라면 최소한 사람들이 원하는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을 빠르게 구현해보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발자들에게 기획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획은 Why에서 시작한다
사이먼 시넥의 START WITH WHY에서도 이야기하듯, 이 책에서도 WHY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아예 3장은 대놓고 제목이 Why이다. 왜 '왜' 라는 것이 중요할까?
당신의 기획도 무턱대고 what만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why를 찾을 수 없는 소비자는 그것을 외면한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제품이 충분히 좋고 필요하다고 해서 구매하지 않는다. 시장엔 무수히 많은 제품들이 있고 거기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구매한다. 사람들의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려야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구매해야할 이유를 전달하지 못하면 당연히 재미없는 쇼츠처럼 패싱 당한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디어만 미디어’인 시대에서 ‘소비자가 미디어’인 시대로 변화되었다. 이런 시대의 콘셉트는 브랜드의 ‘I talk’보다 소비자들의 ‘let them talk’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며, 미디어가 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퍼뜨리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결국 좋은 기획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컨셉(concept)**이 있다.
컨셉은 미디어가 된 소비자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현실과 우리가 바라는 상태 사이의 간극을 정의하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설정된 목적이 하나의 컨셉으로 구체화된다. 물론 그 사이에는 문제 정의, 문제 쪼개기, 의미 부여하기와 같은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기획은 단순하다. 목적과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행 방안을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좋은 기획을 넘어 인생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도식화와 로직트리를 그리고 쪼개고 나누고 다시 묶는 과정 등 책은 기획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런 방법론 이전에 왜(Why) 라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는 태도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말하는 5Why를 이야기한다.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 한 번의 이유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왜?”를 묻는 방식이다. 문제의 표면적인 원인을 넘어 그 아래에 있는 구조적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면 단순히 “마케팅이 부족하다”는 결론에서 멈추지 않는다. 왜 마케팅이 부족했는지, 왜 고객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 왜 그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는지를 계속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문제와 전혀 다른 지점에서 진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이 사고방식을 단순히 기획의 영역에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5why의 위력은 기획을 넘어 인생에도 적용된다. 인생만큼 기획이 필요한 분야도 없으니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면서도 그 이유를 깊이 따져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 문제를 왜 풀고 있는지까지 되묻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Why를 끝까지 묻는 태도는 단지 제품을 기획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설계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일을 선택할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역시 결국 스스로에게 던지는 Why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결국 기획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선행 단계에 그치지 않고 개발자로서 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에서도 필요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분명히 바라보기 위한 태도로도 이어진다.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받는 여러 질문들이 모두 그 안에 포함된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바탕으로 다음 선택을 기획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라고 생각한다.